소설) 별을 쫓는 해바라기 26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남기와 제민을 만난 다음날, 강 형사가 아침 일찍부터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지난 밤 늦게까지 남기와 제민을 데리고 과음을 했기 때문에 술이 깨지 않아 눈을 뜬 채 그냥 누워있는 중이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강 형사를 맞이했다.

"아직 신문을 못 봤겠지. 재우가 해바라기 모임이 자기의 전위핵심단체라고 자백했다는군!"

나는 강 형사가 내미는 신문을 보았다. 재우의 얼굴이 손바닥만 하게 나와 있고, '해바라기 모임 이적단체'라는 활자가 바로 눈에 띄었다. 그 활자는 마치 살아서 세포분열을 하는 것처럼 내 눈을 어지럽혔다.

정보부 발표에 의하면 정부종합청사 점거농성과 시청 앞 폭력시위의 배후로 알려진 전국빈민결속운동본부(이하 전빈결운)대외국장인 장재우(27)는 재야 사상운동가인 노법사와 2년 전부터 빈민들의 모임으로 알려진 해바라기 모임을 설립하여 며칠 전에 의문사한 박윤도(31)를 그 모임의 회장으로 하는 불법단체를 결성하였다.

해바라기 모임은 빈민구호를 전면에 내건 전위단체로서 이것을 기반으로 반정부단체를 육성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정보부는 강원도의 협동농장에 숨어 있던 150명의 회원들을 모두 연행하여 철야 수사 중에 있다. 게다가 이 단체는 종교적 성격마저 띠고 있는데, 교주 겸 회장으로 있던 박윤도가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물의를 빚고 있는...

"난숙이도 연행되었습니까?"

"한밤중에 들이닥쳤으니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다 연행된 걸로 알고 있네."

"지금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도 거기까지는...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반국가단체로 발표되었으니, 쉽게 풀려나기는 어려울 듯싶어."

"난숙일 거기에 다시 들여보내는 게 아닌데 그랬습니다. 강제로라도 못 들어가게 막았어야 했는데..."

나는 난숙이 겪게 될 고초가 떠올라 걱정부터 앞섰다. 걱정이 되는 것을 보니, 내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형은 농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었다. 가난 때문에, 불구 때문에,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순수하게 해바라기 모임의 종교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몇몇 전과자도 있지만, 그들이 정작 사회주의 노선을 따랐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왜 하필 윤도가 죽은 지금에야 재우가 자백을 했을까, 하는 점이야. 그것도 반정부단체로 몰아서."

"재우가 스스로 자백했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정말 믿기 어렵네요. 제가 아는 재우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요."

"......"

나는 재우라는 인물을 잘은 알지 못해도, 재우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떠벌일 위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재우가 때때로 과격한 시위 방법을 택하는 면도 있지만, 자기의 양심마저 팔아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팔아먹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내겐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찌된 일일까? 정보부의 조작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정보부의 조작이라면 이제는 그 지도자마저 사라진 한 불우한 단체를 반국가단체로 몰아 무슨 이득이 있다는 말인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뭔가 잡힐 듯 잡힐 듯 하다 끝내 잡히지 않았다.

"강 형사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솔직히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이제는 정년퇴직도 하셨고, 굳이 편을 들려고 애쓰실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강 형사님의 진짜 솔직한 속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강 형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무언가 망설이는 느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고뇌하는 모습을 보며, 강 형사도 역시 별 수 없는 보통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급한 판단은 뒤로 미루자고. 우선은 내가 조사한 것을 알려줄게."

강 형사가 그렇게 말하자, 내 예상이 적중했다는 생각에 씁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강 형사가 속주머니에서 여러 겹으로 접힌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우선 윤도의 비서격인 천현중이 말인데, 이 자는 불구임에도 불구하고 두뇌회전이 빠른데다가 제법 통솔력도 있어. 천현중은 아마 윤도의 경호원들을 이끌고 어디엔가 숨어 있는 모양이야. 전혀 연고가 없고, 주민등록도 벌써 오래 전에 말소가 되었더군. 그 다음으로 이 잔데 추일룡이라는 녀석이야. 폭력전과 5범에 아주 거칠고 사나운 놈이지. 이 자에게는 인천에 사는 누이동생이 하나 있는데, 우선 거기부터 한 번 들쑤셔 봐야겠어. 그 다음으로 곤도라고 불리는 자야. 이 녀석은 전과가 없어. 부모도 멀쩡히 살아 있고, 형도 큰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거든. 만약 돈이 필요하게 되면, 자기 형에게 손을 뻗칠 것 같아. 자네는 곤도를 맡게. 추일룡은 내가 맡을 테니. 이게 이게 곤도의 사진이야."

강 형사는 서류에 붙어있는 곤도라는 자의 사진을 떼 주었다. 그도 낯이 익은 놈이었다. 형의 왕국으로 들락거릴 때 몇 번 본적이 있는 놈이었다. 유난히 뽀얀 피부가 형을 연상시켜주는 녀석이었다.

추일룡이라는 자는 전혀 본 적이 없는 놈이었다. 너무도 평범하게 생겨 몇 번 마주치더라도 기억에 남을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 자가 폭력전과 5범이라니...

"그들 주위에 잠복하면서 수시로 연락을 취하자고."

"이거 무슨 첩보전 같네요."

"첩보전 이상이야. 만약에 그들이 윤도를 해쳤다면, 자네나 나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 게다가 놈들은 오륙 명씩 떼를 지어 다니는 모양이니, 섣불리 그들과 맞서지는 마. 놈들은 구석에 몰린 쥐새끼처럼 독이 바짝 올라있을 테니까."

"염려마세요. 아버지나 형처럼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난숙이 일은 내가 줄을 대서 알아 볼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설마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이야 씌우려고..."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적단체로 발표했고, 또 난숙인 형과 각별한 관계가 아닙니까?"

"그래, 그게 바로 문제야."

양희가 커피를 끓이니 한 잔 마시라는 말에 사양하며, 강 형사는 황급히 가게를 나갔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이런 일에 종사해 온 사람이라 정년퇴직을 한 후에도 사건만 만나면 힘이 나고 의욕이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나나 커피 한 잔 줘."

나는 주방에다 대고 크게 소리쳤다.